<철저한 개새끼>
오늘 한 후배에게서 오랜만에 이멜이 왔다. 취업걱정과 유학, 대학원 진학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형, 요즘 미국 취직안된다고 난리던데, 현실을 봐야할까요?"
"꿈만 가지고, 학비도 회수 못하게 되진 않을지.."
"현지 한인들의 취업률은 어떻게 되나요? 정착은 가능할지요."
(미튄--;; 내가 어떻게 알아?)
후배의 이멜을 받고, 나도 잘 몰라 오랜만에 해커스를 다시 찾게 되었고, 다양해진
컨텐츠를 구경하다 참 이해가 안가는 젊은이들의 질문들이 보였다.
되게 가능성을 묻거나 취업"률"을 묻고, 통계를 묻고, 메리트가 있나요? 등등
그 마음안다. 돈 한두푼 쓰는것도 아닌데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준비해야지.
희박한 가능성에 목숨걸었다 피볼수도 있는거 매우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실패를 두려워 하는 것 같다. 두려워 하는 건 그렇다 치고
실패가 두려워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것을 보면 참 답답하다.
이쯤해서 내 소개를 하면 미국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늦깎이 이다.
돈이 많아서 온것도 아니고 똑똑하지도 않고, 영어도 못한다. 그래도 힘들다라는 말은
차마 안나온다.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내 소임이기에 묵묵히 버텨내고 있다.
어렸을땐 공부를 잘했다. 잘하니까 또 좋았다. 내가 짱인줄알았다.
대학 시험 봤고, 떨어졌다. 아깝게.. 대기번호 받았는데 상당히 많이 떨궈지는 듯하다가 내
앞에 앞에까지 들어갔다. 나이 스무살이 진짜 인생 좇같다고 생각했다.
재수 했다. 공부가 잘 될리가 없다. 어린나이에 별 고민을 다했다.
당시 86 아시안게임했다. 요즘은 월드컵에다 뭐다해서 별개 다 있지만
그때, 아시안게임, 그것도 코리아에서 하는 아시안게임은 그야말로
내겐 감동이었따. 전경기 다봤다.
아버지한테 절라리 맞고, 군대갔다.
군대가서도 정신을 좀 덜차린듯 했다. 뭐 어떤사람은 인내를 배웠다 인생을 배웠다 했는데
전역날 기다리다 머리 다 빠질뻔했다.
전역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대에 가자.
재수생학원에 등록을 했고, 정말 실로 오랜만에 펜을 잡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해 가을 (추석명절이 지난 바로 며칠 후로 기억된다)..
날벼락같은 소식이 날아 온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우리집이 넘어가게 생겼단다. 아니, 넘어갔다.
대학시험을 보던 때쯤해서 아버지는 10년넘게 해오던 냉면집 문을 닫게된다.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정말 눈물나는 세월이었다)
다행히 그해 나는 설대 담으로 좋은 2개사립대 중 한곳에 합격을 했다. 1년 다니고 휴학했다.
장학금도 없이 사립학교 다니기엔 집안 사정이 넉넉치 못했다.
이제와서 다시 군대갈수도 없고, 학비때문에 학교는 쉬어야 하고.. 그렇게 몇달을
지내다 무작정 고시공부를 하기로 했다. 공부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지. 어렸을 때부터
매우 허약한 몸 탓에 막노동판 나갔다 돈도 못받고 이틀만에 쫓겨났다. 일도
아무나 못한다.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서 일을 도우고, 짱개집에서도 배달일 하며
삼촌이 일하는 정육점에서도 일을 했다.
그러다 하루는 엄마가 돈없어 학교도 못가는데 공부도 못하냐면서 울며 나를 말렸다.
걱정말고, 공부 시작하라고 하셨다. 이때 나도 나름으로 정신 차렸고,
그뒤로 외무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내 어렸을때부터 책을 읽으며 꿈꿔왔던게
세계를 무대로 뛰자는 것이었다. 그냥 취직해도 잘도 미국 지사 발령나것만
지금생각해도 웃기는 짓이었다. 공부는 열심히 했다.
다시 1년이 흐른뒤, 집안사정이 나아져서 복학을 했고, 나도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대학 3학년때 1차되었고, 졸업후 1년뒤에 2차까지 통과했다. 이제 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3차에서 떨어졌다. 꼭 끝에 가서 무슨 힘이 부족한지 다와서 미끄러졌다.
이때에 충격은 꽤 심했다. 너무도 확신한 탓일까? 1달을 술로 지세웠다.
그러던중 고3때 담임선생님을 정말 정말 우연히 뵙게 되었다. 난 그때도 혼자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가슴이 메어와 담임 선생님께 울며 하소연을 했고, 고3때부터 왜이렇게 시험이랑은
인연이 없냐며 선생님앞에서 내 인생을 욕했다.
그 순간 번쩍했다. 선생님 내 뺨을 후려 치신것이었다. 멍하니 어벙벙해진 내게 선생님은
한번더 뺨을 치셨다.
"야 이 못난 것아..니가 몇살이냐? 그게 환갑바라보는 내게 할말이냐. "
선생님은 돈이 없어 30이 넘어 대학문을 밟았다고 했다. 30대 중반에 되서 고등학교
교직에 발을 들여놨다.
감동받았다. 난 아직 젊다. 일어설 수 있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일반적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런계기로 사람이 바뀌고, 마침내
그의 인생이 바뀐다.
이 날 부로 공부 지독히 했다. 술도 끊고, 담배꺼정 끊었다.
2년 더했지만, 결국 떨어졌다. 취직했다. 먹고는 살아야지.
아쉽게 고시를 못한건 억울했지만, 고시공부해본사람이나 주변사람들 보면 다 알것이다.
열이면 열 다 억울하다. 다 한문제때문에 떨어졌다고들 울상이다.
떨어진건 실력이없어서다. 긴장을 해서 배가 아팠다? 바보같이 왜 긴장해?
간땡이가 콩알만하니까 그런거다. 가서 수련좀 쌓아야한다.
하여간 그렇게 몇년을 열심히 일했다. 아참, 나 경제학과 졸업했고, 그냥 사람들이
알만한 은행에서 일을 시작했다. 직장생활 수년차.. 직장에 대한 별 불만은 없었지만
고시, 무엇보다 외국으로 나가보고싶은, 공부해보고 싶은 소망은 누구나처럼
가슴한켠에 묵혀두고 있었다.
몇년전 출장 길에 여관에서 혼자 TV채널을 돌리다
미국 아이비리그에 관한 무슨 다큐멘터리를 봤다. 학부생들의 관한 이야기였지만,
뭔가 강하게 찌릿찌릿 와닿았다.
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다. "도전" 이란 단어, 수년전 고시 3차떨어지고 담임한테
뺨맞은 일화가 다 머리속을 스쳤다.
그 다음날로 서점에 직행 각종 유학서적을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성질이 급해서
영어학원 새벽반도 등록했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사실 난 그 사이 결혼도 했고, 어느순간 나는 한 가정에 가장이 되어있었다.
멀정히 잘 다니던 은행 그만두고, 유학이라니, 그것도 돈도 없는 놈이.
가장 크게 나를 말렸던건 절친한 몇몇 친구들. 부모님이야 돈없어 하고 싶은 공부도
다 못시켰는데 하시며 결국에 맘대로 하라고 하셨다. 마누라도 첨엔 미쳤냐고하다가
며칠뒤, 당신이 정 원한다면 옆에서 힘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현실을 아는 내 친구들은 진짜 날 때려서라도 말리고 싶어하는 듯 했다. 도대체
그 현실이 무엇인지..무엇보다 내가 박사 유학을 간다는 말에 더 했던거 같다.
내가 누군가 경제전공했지만, 백날 고시에만 목매달았던 대학생활 아니었는가,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박사 유학인지.. 가족은 어떻게 하고.
글쎄.. 내가 정리는 잘 못했어도 주변 친구들이 상당히 일리있는 말을 해준것으로
기억한다. 틀린말 별로 없었고, 나 가진고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제길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오기가 났다.
평범한 회사원 김XX. 화가났다. 나이도 돈도 나를 막을 순 없다.
자 일단 내가 하고싶은 건 경제학 박사 과정이었다. 대학졸업한지도 엄청오래됬고,
수학도 다 까먹었다. 다행히 학점은 어지간 했다. 고시공부하면서도 대학공부는
고시공부에 밑바탕이 될거라는 나만에 철학덕에 1학년때부터 학점은 잘 관리했다.
문제는 영어 그리고 무엇보다 석사학위 논문하나 없는 초라한 Resume였다.
일단 영어는 닥치는 대로 했다. 뒤늦게 안거지만 요즘은 뭐 정보 공유해서 토플 올린다던데
그딴거 몰랐다. 닥치는 대로 회사 점심시간 퇴근 후, 고시 공부 할때 이상으로 열심히했다.
내가 이십년이 넘게 학교+공부를 하면서 느꼈는데 공부는 진짜 고도의 초집중력으로
미쳐서 하지않으면 다 그게 그렇다. 오래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어떤 벽을 넘어야한다.
그 벽을 못넘어 대학입시와 고시에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주저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벽이 어디있는 진 몰라도 그 벽을 깨야하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정말 죽으라고했다.
항상 몸이 약해 회사만 갔다와도 해롱해롱 했는데, 마음 다잡고 나선 잠을 줄여도
멀쩡했다. 당시 회사 동료들이 날 미쳤다고 했다. 꽤나 소문이 났는데, 처음에
수근거리고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이 일도 지들보다 빨리 해놓고, 동물처럼 공부하는
나를 나중엔 안쓰러워 하며 응원해주었다.
토플 283에 GRE verbal 600중반으로 그 해 가을 6군데 학교에 박사과정을 지원했다.
다 떨어졌다. 떨어지는거에 도가 텄다. 그뒤로 3월에 직장 사표내고 서울에
한 대학의 경제학 석사과정입학을 했다. 이런, 집에 수입원이 끊겼다. 이땐
와이프도 정말 화가 단단히 났다. 10개월 준비에 결국 미국행은 실패가 되고
뜬금없이 무슨 석사과정인지..
이때 아버지가 큰힘이 되어주셨다. 보증을 서주시고, 돈 삼천을 대출받게 해 주셨다.
이것으로 다음해 가을 대학원 입학까지 돈문제는 해결되었다.
장학금 못받으면 전세금 빼서 학비되면 된다. 그뒤문제는 나도 몰라.
봄학기 부터 닥치는 내로 수업을 들었다. 학위보다는 학점을 원했다.
수학이 중요하다기에 석사 2학기 마칠무렵 지원할때까지, 1년 반치 학점 다 따 버렸었다.
GRE도 두번 더봤다. 총 네 번봤는데 패널티를 주던 말던 점수가 중요했다.
버벌 770나왔다. 만족 스럽다고 생각했다. 논문은 없었지만, 은행에서의 꽤나 긴 경력과
프로젝트 경험(이건 고시공부하다 잠깐 딴 회사 다닐때, 6개월다니다 그만뒀음),
석사 2학기 학점과 교수의 강력한 추천서를 첨부했다. 내생각에 추천서가 큰 역할을
했던거 같다. 이 교수 나를 굉장히 잘 보셨다. 3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직장까지 관두고
학점을 남보다 1.5배 이수하며 A로 깔아버렸으니.. 하지만 정말 이때나는 눈에 불을키고
명절도 휴일도 없이, 집에선 밥먹고 잠만자고 온 나날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그해 나는 마지막이다 하고, 돈아까운줄도 모르며 10개 학교에 지원을 했다.
해가 바뀌고 그때 나는 논문준비를 하고 있었다. 되는데로 학교에 내가 무슨
개짓을 해서라도 가고 싶어하는지를 알리고 싶었다.
지원한 학교 교수들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이멜을 보냈다. 그냥 열정을 보이자.
마지막이니까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식으로 발광을 떨었다. 떨어지면
돌아갈 직장도 없으니까.
마침내 합격발표가 나기시작했고, 처음 받은 6개 학교가 모두 불합격이었다.
미치는 줄 알았다. 맨날 울고싶었다. 남은 네개 학교중 3개가 상향이었거든.
마누라한테 안말했다. 한꺼번에 나온다고 했다. 내말이면 다 믿는 사람이다.
주소도 후배 혼자사는 애껄로 했었다. 상향지원한 학교 하나에서 다시 리젝먹은 후
웨이팅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7개 먹은바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짓고, 맨날 울었다.
그리고 10여일 후,
이멜 확인하려는데 꼭 스팸멜같이 생긴 멜들이 잔뜩와있다.
유학준비시작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해외싸이트도 갑 하다보니 미국에서도
스팸멜 온다고 와이프한테 우스갯소리도 하고 그랬다.
근데 뭐가 좀 달랐다. 순간 찌릿찌릿하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멜을 열었다.
Congratulation.
드디어 해냈다. 학교에 있었던 나는 10살이나 어린 대학원 친구들 붙잡고 뛸듯이 기뻐했다.
그길로 택시타고 집에 갔다. 합격소식을 알리자 와이프 그렇게 기뻐할줄 모른다.
그렇게 울 줄 몰랐다.
그게 불과 2년전일이다.
현재 30위권 대학에 있고, 첫해는 앞에서 한말대로 전세금빼서 돈 대고, 지금은
학교에서 재정지원을 받고있다. 나 나이 많아. 88올림픽때 군에 있었어. 그럼 감이 잡히겠지.
참 힘들었지만, 난 지금 정말 행복하다. 비전없는 경제학 박사..
얼마나 안다고 사람들이 나부랭거리고 논쟁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럴시간있으면
단어하나 더외워서 GRE, GMAT만점을 만들어라. 당신이라고 만점 못맞으라는 법있나?
하버드나와서 취직않됬네 어쩠네 해도 내생각은 달라. 어젠간 다 지밥벌이 해먹고 살어.
도대체 뭘바라고 유학을 가나? 부귀영화? 그럼 돈벌어. 인생역전 사업 스토리
인터넷가면 널렸으니 그거 참고하고 사업해.
여기 일부 학생들처럼 이거 할까 저거 할까 고민만하고, 겁내고, 쉬운것만 찾다간
당신들이 말하는 찌질이 박사 딱가리도 못해.
그래. 취직안되면? 교수안되면? 뭐가 겁나? 나 돈도 없고, 박사마치고 뭘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후회하지않아. 지난 시간 후회하고, 술쳐먹은 시간 아까워서 라도
이젠 후회하는 시간, 취직 걱정하는 시간에 책한자 더읽고 집에가서 와이프 얼굴이라도
한번 더 보겠어.
그리고 그냥 말하겠는데, 돈 탓좀 제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세상 돈으로 돌아가고
돈없는게 죄라는 세상이지만, 정말이지 정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간다. 열이면 아홉은 유학의 꿈 한번쯤은 가져봤을꺼야. 드넓은 캠퍼스, 아름다운건물들,,
근데 세상이라는게 호락호락하지않어. 꿈이라는게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꿈을향해
미친듯이 매달리는 사람들만 좀더 그 꿈에 다가설수 있을 뿐이야.
나도 어린나인 아니지만 세상엔 나보다 늙은 나이에 인생의 좌초되고 다시 일어서는
경우가 참 많이 있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선택이 필요해서
고민하는 것은 좋지만, 무섭거나 후의 실패가 두려워서 포기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정녕 니가 유학을 가고 싶고, 그래서 여기 게시판을 우왕좌왕하고 있는 자라면
더욱더! 포기하지말고 끝날때까지 한번 밀고 나가봤으면 좋겠다.
(에필로그)
한 친구가 나를 "철저한 개새끼"라고 한적이 있다. 부모생각도 가족생각도 안하고
지 생각만 한다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고...
난 정말 철저한 개새끼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마음 가짐이
지금에 나를 만들었고, 난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
내가 그렇게 나쁜놈 이었다면 이젠 난 다시 철저히 그들에게 사랑을 되갚고 싶다.
이상 먼 이국땅서 철저한 개새끼가.
_ 이상 해커스의 철저한 개새끼(?) 님의 글입니다.
Ota Gisuke (삼성전자 디자인그룹VD 고문)
스스로의 창조에 대한 물음이 찾아오면 내면의 점검을 하십시오.
"완전한 자립" 이 바로 그것 입니다.
이는 보여 주기 위한 충실이 아닌,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해서 기뻐 눈물이 날 것 같은 충실이 그것 입니다.
그런 내면의 충실이야말로 좋은 디자인의 창조입니다.
from. SADI
미디어 임페리얼리즘
뉴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 사이의 정보 유통을 미국과 몇몇 서방국가가 독점함으로써 세계 정보질서를 지배한다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정보제국주의라고 번역된다. 이 정보제국주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상의 국가는 중심국인 선진국과 주변국인 개발도상국으로 나누어지며, 세계의 정보는 중심국에서 주변국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주변국은 중심국에서 흘러들어 온 뉴스를 자국의 시각이 아니라 중심국의 시각을 통해 보게 됨으로써 뉴스를 독자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중심국의 시각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듯 선진국의 정보력이 주변국의 정보력을 장악하는 현상을 가리켜 미디어임페리얼리즘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24시간 뉴스전문 방송망인 CNN은 걸프전쟁 당시 전세계를 대상으로 실시간 뉴스를 내보내 빠른 보도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미국의 편에 서서 방송함으로써 이 방송을 지켜본 사람들 역시 자연스럽게 미국에 동조하는 경향을 띠게 만들었는데, 이런 것이 미디어임페리얼리즘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정보제국주의가 단순히 정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급속한 정보화로 인해 인터넷의 보급이 전세계로 확산되었지만, 존재하는 웹사이트 가운데 80% 이상이 영어로 쓰여짐으로 해서 영어가 세계 각국의 언어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일고 있다. 또 정보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함축되어 있어 사회구조·가치관·생활양식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제국주의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선진국 중심의 세계정보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1973년 75개 비동맹국 수뇌들이 알제리 수도 알제에 모여 국제적인 정보의 흐름에 국가의 개입을 인정시키려는 대항 원리를 내세웠는데, 이 대항 원리를 신세계정보질서라고 한다.